2010-10-13

의욕 상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커피와 브라우니

  며칠 동안 여러 가지로 생각도 많이 해 보고, 잘 놀다가 왔습니다. 기존의 글을 지운 뒤, 그냥 그동안 들었던 생각을 간단하게나마 쓰고! 이 포스팅을 마무리지을까 해요.


1. 테세우스의 배

  처음에 정확한 용어가 기억이 안 나서 한참 검색을 했습니다 ㅋ

  테세우스의 배란 간단하게 말하자면 배의 부품이 하나하나 교체되기 시작하여 배 전체가 다른 부품으로 교체되었을 때, 그 배는 원래의 배와 같은 배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논리학의 역설을 의미합니다. 하나의 존재가 약간 변화해도 그 존재가 다른 개체가 되는 것은 아닌데, 그러한 식으로 존재가 서서히 변화해 나아가면 그 존재가 다른 것이 되었다고 할 수 있냐는 물음입니다.

  요즘 같은 재미없는 세상에서는 이것을 꽤 쉽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원래의 배를 A라고 정의하면, 부품 하나가 변화한 경우를 A'라고 정의할 수 있게 됩니다. 두 개가 교체되면 A'', 세 개가 교체되면 A''' 이런 식으로요. 그러면 최종적으로 모든 부품이 교체된 경우를 A'(n)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A와 A'는 높은 동일성을 지니고, A'는 A''와 높은 동일성을 지닌 존재가 됩니다. 반면 A와 A''는 A'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화된 동일성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따라서 원래의 배 A는 최종적으로 바뀐 배 A'(n)과 A'에 비해 약화된 동일성을 지닌 관계로 정의를 할 수 있겠습니다.

  자! 그럼 이제 이 예를 배에서 사람으로 돌려볼까요. 하룻밤을 자고 난 오늘의 나와 어제의 나는 과연 같은 사람일까요? 위에서 전개한 방식대로라면 세상에서 가장 높은 동일성을 가진 개체이기는 하나 같은 완전히 같은 개체는 아니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그 관계가 훨씬 약화된 2살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많이 다른 개체일까요? 외형적으로 보면 아이와 어른은 분명 다른 존재이니 다른 개체가 됩니다. 불가에서 말하는 제행무상(諸行無常)과 비슷한 의미가 되네요. 간단합니다.

  그런데 삶을 살아가면서 보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다르게 보지 않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막말로 친구들에게 '그건 어제의 내가 약속한 일이니 오늘의 나는 그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어'라고 말한다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겠지요. 또 범죄자가 '그 죄를 저지른 것은 오늘의 나와 다른 어제의 나이니 범죄에 따른 처벌은 어제의 나에게 내려야 한다'라고 주장하면 그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높은 유사성을 지닌 개체가 같은 개체가 아니라면 이러한 주장이 사실 납득되어야 하는데 말이에요.

  이러한 역설은 각 개체 간의 '관계'때문에 생겨난다는 생각이 듭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른 존재이지만, 각각의 존재 간에는 관계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의 개체로 묶어서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타인과 자신의 관계에 의해서도 강화되지만, 매 순간순간 존재하는 자신의 무한한 관계의 연장선에 의해 가능한 듯합니다. 즉!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를 만들고, 내일 예상되는 나에 의해 오늘의 내가 변화하는 끝없는 과정을 겪으면서(편의상 기간을 하루로 자르기는 하였지만, 이를 더 세분화하거나 넓혀도 됩니다. 우리가 편의상 자연수를 쓰는 것과 같은 원리예요 ㅋ) 동일하지 않은 개체들의 집합이 동일하게 파악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자 그럼 재미없는 이야기는 이쯤 하고, 왜 이 이야기를 하는가에 대해서 말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문득 돌아보니, 저는 어느 순간인가부터 무기력하고 의욕이 없는 상태가 되었더라고요. 언제부터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유도 잘 모르겠고요. 그래서 이것을 변화하고자 하는 욕구마저 사라지기 전에 해결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가 과연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그 변화가 과연 옳은 것이 맞을까라는 의미 없는듯한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에 대해 고민을 하다 보니 위와 같은 생각이 들었네요. 사실 쓸데없다면 정말 쓸데없는 생각이고, 불가에서 말하는 것처럼 존재하지도 않는 자아에 집중하는 무상한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뭐, 하지만 의미가 없거나 무상하다고 해도, '지금 이 순간'은 항상 중요하잖아요. 그래서 주절주절 이야기를 해 보았습니다.


2. 변화

  변화라는 단어는 형태를 바꾸다라는 의미의 한자어 조어입니다. 위에서 말한 대로 형태를 바꾸더라도 그것이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존재하는지 아닌지도 애매모호한) 본질이나 자아가 변화하지 않는다고 안심하고! 이제 변화에 대해 생각을 해 볼 수 있게 되었네요.

  저는 인간입니다. 뭐 인간이 덜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_-; 생물학적으로는 분명 인간이 맞는 듯합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 저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은 변화에 호기심을 가지지만, 동시에 두려움을 느끼는 듯합니다. 그리고 그중 두려움 쪽이 훨씬 압도적인 감정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매슬로우(Maslow)의 욕구단계이론에서 제일 원초적인 욕구가 생리적 욕구이고, 그다음이 안전에 대한 욕구임을 감안해 보면 인간은 안전한 것을 매우 좋아하는 동물인 듯싶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안전이 보장되는 한도에서 다른 것을 바라지요. 즉, 안전이 보장되는 한에서 그 이상의 호기심을 발현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자신에게 주어진 안전을 뿌리치고 호기심을 선택한 여러 영웅들의 멋진 이야기가 많이 전해집니다만, 그 이야기가 멋진 이야기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흔하지 않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한 상황은 흔한 상황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직관적으로 아이들의 행동을 보면 이를 더욱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낯선 물체가 나타나면 쭈뼛쭈뼛 손을 가져다 대지요. 손을 댄 후에 그걸 입으로 집어넣어 부모님 속을 태우는 아이들도 많습니다 -_-;; 이 자체는 분명 왕성한 호기심의 발로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 즉 손으로 그걸 집는 과정을 보면 아이들도 안전한 것을 더욱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나는 안전하지? 그럼 조금만 손을 앞으로 내밀어보자. 반응이 없으니 아직 안전하구나. 그럼 조금 더 손을 내밀어 보자. 그래도 괜찮네. 그럼 살짝 손가락을 대 보자. 멀쩡하구나. 그럼 한번 움켜쥐어보자. 오 아무 일도 없군. 그럼 입에 넣어보...' 음 입에는 넣지 말아야 하니 이쯤까지만 하죠 -_-;;;

  물론 안전과 불안전의 개념이 없는 아기들은 불 손에도 손을 집어넣곤 하지만, 그건 아직 아이들이 불안전한 대상이 주는 대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뭐, 마찬가지로 모험을 거리끼지 않는 영웅들 역시 실패에 따른 대가를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흠 이건 별로 마음에 드는 해석이 아니니 그냥 버리겠습니다.

  위와 같은 이유로, 인간은 변화에 호기심은 가지긴 하지만 막상 변화가 오는 것을 싫어합니다. 변화는 위험을 초래할 확률이 있으니까요. 기존에도 잘 지냈다면 그냥 그대로 지내는 것을 선호합니다. 마치 물체가 가지고 있는 관성처럼, 어제도 괜찮았고 오늘도 괜찮았으니 내일도 괜찮을 거라는 귀납적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 이것이 습관이 되고, 개성을 만드는 데 영향을 주지요.

  그래서! 지금의 저와 같이 변화를 한 번 해 보자라고 생각을 해도 기존의 생활이 큰 문제가 없다면 다시 은근슬쩍 거기로 돌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비록 이성적으로 그 생활이 앞으로 문제를 초래할 듯하여도, 어쨌든 여태까지 괜찮았으니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작심삼일, 의지박약이 되는 것이죠. 저처럼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


3. 결론

  그럼 어찌해야 할까요. 뭐 모범답안으로는 '매일매일 의지를 다져서 멋지게 목표를 이루도록 하자' 정도가 있겠지만, 이건 정상적으로 고등학교 과정을 이수하기만 하면 수능시험에서 만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처럼, 원론적으로 맞기는 하지만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그럴듯하지만 공허한 소리입니다.

  저는 우선 그동안 습관으로 굳어져서 어느 순간 당연히 하고 있는 여러 쓸데없는 일들을 정리하는 것으로 이를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사실 굳이 해야 할 필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매일 해 오다 보니 어느 순간 의무처럼 된 일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그렇게 하니 그동안 사실 아무것도 아닌 일에서 꽤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오고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괜히 혼자 의무감에 젖어서 행동하고, 그것 때문에 또 스트레스를 받고…… 우선은 이 가짜 의무의 고리부터 끊어내고자 합니다. 무엇보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스스로 만들어 낸 짐을 벗어내는 것 같은 홀가분한 기분이 듭니다. 뭐 이에 관련된 것은 여러 가지가 있고, 아직도 많은 것이 현재진행형이지만 우선 이 글을 쓰는 곳이 블로그이니만큼 블로그에 관한 이야기만 해 볼까 합니다.

  처음에 블로그를 만들었던 이유는 스스로의 기록을 남기는 것이 그 목적이었습니다. 삶을 살며 고민하고 느꼈던 많은 생각들이 (비록 쓸데없는 생각일지라도) 그냥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까워서 블로그를 개설하였었지요. 사실 이러한 목적에는 일기장 쪽이 훨씬 적절하지만, 컴퓨터 쪽이 접근성이 훨씬 큰 데다 인터넷상에 존재할 경우 공간의 접근성도 훨씬 넓어져서 이 쪽이 편리했습니다. 게다가 사진이나 자료 찾기도 훨씬 쉽고요.

  그런데 어차피 글 쓰는 것, 제가 도움을 받은 것처럼 다른 분들께도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올려보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방문자 분들이 남겨주시는 의견에 피드백을 하면서 의사소통의 도구로도 블로그가 이용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어느 순간 저는 현재의 저를 기록하고자 하는 원래의 목적보다는 기록 자체에 의미를 더 두지 않았나 싶습니다. 즉, 과정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하기 위한 과정을 밟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블로그가 하나의 의무처럼 느껴지게 되었고, 생활이 조금 바빠지자 블로그를 손 놓아 버렸습니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께 내기 위해 쓰던 일기처럼 블로그가 짐으로 느껴졌었나 봅니다. 그게 이번에 블로그를 닫을까 고민을 하게 된 이유였습니다. 자신이 만든 가짜 의무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블로그를 닫는 편이 나을 테니까요.

  그렇지만 블로그를 애초에 만들었던 필요성을 지금 역시 느끼고 있고, 기록을 좋아하는 성격상 블로그를 그만두는 것은 손해가 훨씬 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지금까지 썼던 글을 백업한 다음에 닫아버릴까도 했는데, 지난 몇 년간 썼던 글들을 죽 보고 있자니 앞으로 블로그를 닫으면 이 같은 과거의 기록을 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면 아쉽잖아요 -_-a

  그래서 우선 블로그에 대한 마음가짐을 바꾸고자 합니다. 물론 그 결과물인 블로그 안의 글들은 예전과 같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 자신에게는 크게 다를 것이라는 기대감이 생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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